중구투어
제물포구락부와 인천역사자료 박물관
- 작성자 :
- 관리자
- 작성일 :
- 2011-12-26
자막
맑고 청명한 겨울하늘. 찬란한 햇빛과 대조되는 차가운 공기 속에 단아한 멋을 낸 하얀 2층 가옥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신한 개항기 외국인들의 사교클럽, 바로 제물포 구락부다. 제물포구락부의 원래 명칭은 ‘제물포클럽’. ‘클럽(club)’이 일본식 가차음인 ‘구락부(俱部)’로 표기된 것이다. 클럽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제물포구락부는 1901년 6월, 제물포에 거주하던 미국·영국·독일·러시아 등의 외국인이 사교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지붕을 양철로 덮은 2층의 벽돌식 건물로, 당시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설계해 1901년 6월22일 미국공사 알렌의 부인이 은(銀) 열쇠로 출입문을 열며 화려하게 개관했다고 한다. 내부에는 바와 테이블 등을 구비한 사교실과 도서실, 당구대 등을 갖추고, 외부에는 테니스코트를 설치하는 등 당시 한국인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호화로운 시설이었다. 서구 강국들의 외교관, 세관원, 의사, 상사직원들이 주로 이곳을 이용하며,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외교전을 펼치던 곳. 미국공사 알렌과 고종의 주치의였던 독일인 의사 분쉬,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만든 에케르트,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차를 도입한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 미국의 이민사업가로 많은 한국인을 하와이에 보낸 데쉴러 등 수많은 외국인들이 스쳐간 이 곳. 보름마다 정기적으로 무도회를 열고, 술과 음식들을 곁들여 춤을 즐겼던 멋스러운 이곳. 당시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 구한말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을 어떤 생각으로 바라보았을까? 제물포구락부는 지금 현재 우리가 제물포클럽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인천이 개항을 하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서양인들 즉, 각 나라의 대사관 혹은 세관원 그리고 각 나라의 무역상사 사업가들이 사교모임을 위해서 만들었던 장소입니다. 제물포클럽은 인천국립박물관으로 사용이 되기도 했었는데요, 지금 현재는 재물포클럽의 회원국으로 참가했던 각 서양 여러 나라의 문화들을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개항이 되었을 당시에 건축물도 작게 축소해서 여러분들이 그때를 조심스럽게 엿볼수 있는 기회도 드리고 있고요, 서양 각 나라의 문화 특히 어떤 내용을 가지고 인천에 들어왔었는지 그런 다양한 내용들도 함께 전시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꼭 한번 들러서 인천이 개항했을 당시의 어떤 서양인들이 어떤 내용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왔었는지 여러분들이 직접 한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제물포구락부는 한일합병 이후 일본재향군인연합회가 정방각(精芳閣)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다가 일본부인회관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뼈아픈 역사를 가진 현장이기도 하다. 광복 후에는 사교장으로써의 내력을 이어 미군 장교클럽으로 사용되었고, 1953년엔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이 이곳에서 재개관되기도 하였다. 1993년 7월 6일 인천시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지난 2007년 인천문화원연합회가 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다. 현재의 제물포박물관은 과거 제물포구락부 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운영되며, 개관 당시의 국가 및 아시아 국가들과의 친선활동을 펼치고, 개화기 풍물 전시관으로 또 인천의 개화사에 대한 강연도 하고 있다. 자유공원에서 내려오는 계단과 연결된 2층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홀 중앙에 사교클럽임을 알려주는 바와 휴식공간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스토리텔링 박물관답게 에피소드 드라마와 다큐멘터리가 벽면 곳곳에 상영되고 있다. 내부 곳곳에는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영국 등 제물포구락부를 이용했던 당시 강대국들의 전시품들이 진열되고, 개항기 당시의 건축물 모형도도 전시하고 있어 은은한 분위기에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겨온다. 제물포구락부와 인천역사자료관에는 공통점이 있다.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을 재해석하고 활용하여 현재의 훌륭한 관광지로 탄생시킨 것.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숙제 역시 과거를 기억하며 보다 발전된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 이전글
- 걸어가는 섬 소무의도
- 다음글
- 월미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