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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가 살아 숨쉬는 <중구 이곳저곳>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4-06-27

자막

한국 근현대가 살아 숨쉬는 “중구 이곳저곳” *율목도서관_ 인천시의 중구가 한 눈에 보이는 율목도서관은 인천 최초의 도서관인 시립도서관이 1946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된 후, 지금까지 시민들의 지식/정보/문화의 보금자리로 정착해 왔다. 현재는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시간의 역사성을 간직한 채, 이용자 중심의 도서관으로 거듭나기 위한 미래지향적, 친환경적 도서관으로 재탄생하였다. *율목공원_ 율목공원은 조선 말 법부대신 이하영이 소유한 과수원이었다. 그 뒤 일본인들이 답동 대지와 과수원을 맞바꾸어 일본인 전용 공동묘지와 화장장으로 사용했는데, 해방 후 철거되고 공원이 들어섰다. 1995년까지 야외풀장이 있었던 곳이며, 지금의 모습은 최근에 개장한 것이다. *답동성당_ 벽돌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며, 1890년대에 건축된, 한국 성당 중 가장 오래 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소속 E.J.G.코스트(한자명 高宜善) 신부의 설계로 1897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1937년 코스트 신부와 같은 소속인 P.시잘레(한자명 池士元) 신부의 설계로 증축되었다. 답동성당은 그 위용과 아름다움으로 개항장(開港場) 제물포(濟物浦) 시대부터 이곳의 역사적인 건축물로 꼽혀왔으며, 인천교구 내 102개 본당의 주교좌 성당이다. *애관극장_ 1895년에 문을 연 국내 첫 실내공연장이자 사설 공연장인 '협률사'가 모태인 극장이다. 인천의 '협률사'는 1902년 고종에 의해 지어진 서울 정동의 '협률사'보다 7년이나 먼저 문을 열었다. 그 후 잠시 '축항사'로 이름이 바뀌게 되고, 1915년부터 지금의 '애관극장'으로 개명, 연극과 영화를 주로 올리는 상설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우현 고유섭_ 우현(又玄) 고유섭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미술사와 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여 우리 미술을 처음으로 학문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미술학자이다. 살아생전 개성 부립 박물관에 있는 동안 그는 미술사 기초자료 수집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고 우리 미술사 전반에 관한 여러 형태의 글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또 우리 미술사뿐만 아니라 예술론과 미술비평에 이르기까지 학문과 예술에 대한 폭 넓은 지식과 깊은 정열을 보여주었으나 아깝게도 1944년 40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전환국_ 1883년 당면한 재정위기를 보완하고 문란해진 통화정책을 정비할 목적에서 독립된 상설조폐기관인 전환국을 서울에 설치하였다가, 1892년 인천으로 이전하였다. 여기에는 일본인의 영향력이 강한 인천에서 자본과 기술을 미끼로 조선의 화폐권을 침탈하려는 일본의 속셈이 있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환국의 설립은 조선사회에 근대적 화폐제도를 도입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지만, 1904년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 의해 폐지되고 말았다. *삼치거리_동인천역 앞 인천학생문화회관 옆 골목이 삼치거리 이다. 이 거리는 지금부터 40여 년 전 '인하의 집' 이라는 식당이 생기면서 시작됐다. 그 후 차츰 가게가 늘어 2002년에는 인천 중구청에서 삼치구이거리로 지정했다. 가게마다 삼치를 구워내는 방식과 찍어 먹는 소스에 따라 약간의 맛 차이가 난다. *내리교회_ 인천 중구 내동에 위치한 감리회 교회이며 1885년에 아펜젤러에 의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교회이다. 이에 개신교에서는 "한국의 어머니교회"라고도 부른다.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로 꼽히는 영화학교를 설립하는 등 여러 부문에서 "한국 최초"의 기록들을 갖고 있다. 내리교회는 초창기부터 교육과 선교를 병행하여 한국에 개화 문물을 들여오는 데 일조했다.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_ 미국 감리교 목사로 한국에 와서 활약한 선교사이다. 한국선교회를 창설하고 내리교회와 영화학교,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였다. 암기 위주인 한국의 교육방식을 이해중심적인 교육방식으로 고치는 데 공헌하였다. *신포동 칼국수골목_ 1980년대 인천 청소년들에게 '칼집' 혹은 '칼 레스토랑'골목이라고 불리었던 곳. 주머니 가볍던 학생들은 이 골목에서 200원, 300원하는 칼국수로 마음까지 든든히 채웠다. 그 당시엔 극장 상영 중이던 홍콩 느와르 영화를 틀어주어, 영화 한편을 온전히 보기 위해 친구들과 동전을 모아 한 그릇 더 시켜 먹기도 했던 곳이다. 이 곳 칼국수의 특징은 튀김가루를 듬뿍 넣은 칼국수라 할 수 있다. *인천중구청사_ 지난 2006년 4월 등록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된 중구청사는 지난 1933년 근대 건축 양식으로 인천부 청사 용도로 지어진 뒤, 인천시청사로도 이용되는 등 역사적·건축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인천일본제1은행지점(개항박물관)_ 인천 개항당시 인천의 유일한 금융기관으로 1880년대 후반에 개설되었으며,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 대한 금융침투가 급속하게 증가하였고, 국내 금융기관 최초의 지점은행이었던 대한천일은행으로 유입되는 자금줄을 끊기 위한 작업들도 진행하였다. *인천일본18은행지점(개항장근대건축전시관)_ 나가사키의 일본18은행이 해외에 세운 최초의 지점. 나가사키 상인들은 영국 면직물 중개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거둠에 따라 수출무역의 중심지인 인천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한국근대문학관_ 100년 세월의 물류창고를 개조한 박물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한국 문학사 중 1890년대 계몽기부터 1940년대 후반까지 근대문학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국내에 60여 곳의 문학관이 있지만, 특정 문인과 유파를 떠나 근대문학을 총망라한 문학관은 이곳이 유일하다. *이상_ 인간 모순을 언어적 유희와 역설로 표현함으로써 시적 구제(詩的救濟)를 꾀한 시인이자 소설가. *박태원_ 문장 그 자체의 예술성을 중시하고, 새로운 소설적 기법을 시도하는 한편, 인물의 내면 의식 묘사를 중시하는 등 강한 실험정신을 보여준 소설가. *현덕_ 소설가·아동문학가.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남생이》가 당선되었고, 이때부터 1940년까지 본격적으로 소설과 동화를 발표하였다. 작품 전반에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하게 배어나오며 《집을 나간 소년》, 《토끼 삼형제》외 다수의 작품을 두었다. *함세덕_ 극작가. 낭만주의적 정서에 기반을 둔 사실주의극의 집필에 몰두했다. 인천출생으로 특히 어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즐겨 썼다. *청일조계지 경계계단_ 1883년 설정된 일본 조계(租界)와 1884년 설정된 청나라 조계의 경계지역으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과 연결되어 계단과 조경이 마련된 공간이다. 이 계단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건물들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전통 건축양식으로 들어서 있다. 계단 자체는 평범하나 장소가 지닌 가치와 역사성이 매우 높게 평가되는 유적이다. *제물포구락부_ 원래 명칭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외교관들을 회원으로 둔 '제물포 클럽'이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14년 개항장 일대의 조계를 없앤 이후 '클럽(Club)'이 일본식 가차음인 '구락부(俱樂部)'로 불리고 그것이 그대로 굳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자유공원(만국공원)_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 구한말 인천의 제물포항은 외국 열강의 자본과 사람이 조선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되었고 이곳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한 만국공원이 1888년 세워졌다. 한국전쟁이후 '자유공원'으로 바꾸었으며 혼란스러운 근현대 한국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장소이다. *짜장면박물관_ 원래 짜장면을 최초로 개발하여 판매한 '공화춘(共和春)' 건물을 복원과정을 거쳐 짜장면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7개소의 전시공간과 기획전시실을 갖추어 개항기 인천의 화교와 짜장면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게 조성되었다. *인천역_ 1897년 3월 착공을 시작해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 개통된 경인철도의 시발지이다. 당시 인천항이 제물포항으로 외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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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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