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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근대식 군함 양무호와 광제호, 그 처절한 역사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6-01-07

자막

한 나라가 자주국방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잣대중 하나가 최신예 군함 보유 상태이다. 이제는 대한민국도 이지스급 군함을 도입, 제작하고 기동전단을 창설하면서 대양해군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럼 이런 최신예 군함을 만들지 못했던 근대 개항기에는 어땠을까? 외세의 침략속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했던 근대식 군함. 그 처절한 역사를 살펴보자. 제목_ 최초의 근대식 군함 양무호와 광제호, 그 처절한 역사 1903년 4월15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가 인천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외세의 침략으로 근대식 전함의 위력을 뼈저리게 느꼈던 대한제국은 자체제작이 불가능하자 일본 마쓰이 물산에게 군함을 구입한다. 원래 그 군함은 1894년에 마쓰이 물산이 영국 딕슨사에서 구입한 화물상선으로 9년동안 운영할만큼 운영하다가 약간의 개조를 핑계로 폭리를 취하며 팔아먹은 군함이다. 그러나, 그 시절 일본 화물선이 580톤이었을 시절에 3천4백톤급이라는... 현재 우리나라 기술력으로 만든 광개토대왕급 구축함과 같은 급수였으니 그 위용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 군함이 바로 ‘나라의 힘을 키운다’라는 뜻의 ‘양무호’이다. 양무호의 초대함장은 개화파 박영효에 의해 일본에서 근대식 항해교육을 받은 인천 출신 신순성이다. 국방비의 30%를 지불한 ‘양무호’는 신순성 함장과 71명의 선원이 맡았으나, 일본이 항해기술을 전수해주지 않고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어 늘 항구에 정박해 있다가 러일전쟁때에는 일본에 강제 징발당하고 1905년 을사늑약이후 다시 화물선으로 개조되어 인천항에 되돌아오게 된다. 군함으로서 임무를 해보지도 못한 채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또한 양무호를 인도받은 후 대한제국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다시금 새로운 군함 발주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광제호’이다. 일본 가와사키조선에 발주한 ‘광제호’는 1,056톤급의 군함으로 그 당시 최신의 조선기술과 더불어 무선통신 설비까지 갖춘 최신예 군함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승무원으로는 양무호 함장이었던 신순성만이 항해사로 승선하였고, 을사늑약후 일본의 관용선으로 줄곧 차출되어 등대관리나 실습선으로 사용되었다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이후 석탁운송선으로 전락. 광복을 계기로 일본인들의 귀국후송선으로 사용된 후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최초의 근대식 군함이었던 양무호와 광제호는 나라의 사활을 걸고 구입한 배였지만 나라의 운명과 함께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된 것이다. 해상방위를 위해 단 한 번도 출항한 기록이 없는채로 말이다. 자주국방의 길.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말이다. 특히나 최초의 근대식 군함 함장, 최초의 해군사관학교가 있었던 인천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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